본문 바로가기
현직자용 꿀텐츠/한국을 빛낸 작가들

한국의 유명 소설가 4번째 - 작가 이효석

by 꿀댈 2021. 5. 25.
반응형

한국의 유명 소설가 4번째 - 이효석 작가

 

안녕하세요 ! 뚠띠뚠띠입니다!

요즘 저는 한국의 유명 소설가 분들의 소개와

대표작품에 대한 안내를 해드리고 있어요 !

 

아직 1,2,3편을 못보신 분들은 아래를 참고해주세요 :)

 

https://gguldaeri.tistory.com/10    박경리 작가 소개와 대표작품

https://gguldaeri.tistory.com/11    황순원 작가 소개와 대표작품

https://gguldaeri.tistory.com/12    김유정 작가 소개와 대표작품

 

 

이번엔 이효석 작가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게요 !

메밀꽃 필 무렵으로 엄청유명한 작가님이시죠 !  

 

 

저는 가끔 평창에 놀러갈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의 배경이어서 그런지

관련해서 마케팅을 해놓은 곳이 있더라구요 !

평창에 들리실 일이 있으면 한번 봉평쪽으로 가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

메밀음식도 맛있어요 !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이효석 작가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작가소개 이효석 작가

이효석(李孝石, 1907년 2월 23일 ∼ 1942년 5월 25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작가이다. 호는 가산(可山)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 안원대군파이다.

 


2. 작가의 생애

1907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에서 한성사범학교 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던 부친 이시후(李始厚)와 성결교단 집사였던 모친 강홍경(康洪卿)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인 1928년 잡지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참고로 고등학교 시절 처음 만나 절친하게 지낸 친구가 유진오다. 유진오는 시를, 이효석 본인은 소설을 써서 서로 교환하여 읽고 비평하며 우정을 다져갔다. 그리고 이효석이 잡지에 글을 써서 받은 고료로 유진오와 자주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임종하기 전 보고싶다고 했던 사람도 친우인 유진오였다.

그러면서 1931년 일본인 은사의 도움으로 취직하기도 했는데 하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근무하는 서기였다. 양심의 가책과 세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한 이효석은 불과 보름 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평론가 이갑기[1]에게 "네놈도 결국은 개가 다 되었구나!"라고 매도당한 데 충격을 받아 사직했다는 일화가 전하나, 이효석의 경성제대 영문학과 2년 후배인 조용만[2]의 회고에 따르면 이는 낭설일 개연성이 높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동조하는 경향의 작품을 펴냈다. 이후 작품의 경향이 바뀌어 순수 문학의 길을 걸었고,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사실 향토색 짙은 작품만 쓴 것은 아니고, 모던보이나 근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도 있으며, 불륜과 치정극을 다루는 대중 소설도 냈다. 다만 의무 교육 상에서 다루어지는 이효석은 메밀꽃 필 무렵의 그늘이 너무 강해서 향토적인 작품을 낸 작가라는 부분이 아직까지도 크게 강조되는 편이다.

무엇보다 메밀꽃 필 무렵을 포함한 단편 몇개를 제외하면 문학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소설가가 아니다. 특히 장편들은 평이 나쁘다. 장편소설가 이효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재능. 그나마 화분 정도가 언급되는 정도.[3] 소설은 글이 다소 거칠더라도 서사 먼저 있고 문장이 다음인데 이효석은 아주 전형적인 문장만 예쁜 작가였다. 서사를 묵직하게 끌어가며 메시지를 주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의 작품들은 항상 기승전결의 '결'에 가면 힘이 빠져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당연히 글이 길어지면 질수록 이 단점이 커지니 장편들에 대한 평이 특히 박하고, 단편 몇개만 기억에 남은 것이다.

그런 이효석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이상, 김동인, 김유정 같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들과 나란히 자기 이름딴 문학상을 갖게 되고, 일반인들 사이에선 거장이라는 과분한 대우를 받는것은 전적으로 친구 잘둔 덕이다. 절친한 친구 유진오가 소설가면서 정치인이자 법조계 거물이라 정치 권력을 뒤에 두고 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먼저 간 친구를 기리고 부각시키는데 성심을 다했다. 반민족행위 경력이 있음에도 오래 회자되는 작가들은 서정주나 김동인처럼 차마 지워 없앨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성과가 뚜렷한 작가들이 대부분인데[4] 전형적인 한작품갑인 이효석은 유진오의 판깔기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반민족행위 경력도 가난에 찌든 말년의 비참함이 부각되어 동정표를 받을 수 있었고.

김동리는 그의 작풍에 대해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을 내렸다. 비판이 아니라 마치 시인이 소설을 쓰듯, 소설의 분위기를 잡는데 능하다는 뜻이다. 이는 그의 작품 중 메밀꽃 필 무렵에 잘 나타난다.1933년 8월부터 순수문학단체인 '구인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탈퇴, 193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36년에는 걸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는 등, 교직에 있으면서도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차대전 와중에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병에 걸린 자신의 아내와 차남을 살리고자 부득이하게 친일행적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1940년 연이어 세상을 뜨고 만다.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호강을 부리던 놈이 객기로 그만둔 것은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으나, 먹고 살고자 다시 왜놈에게 아첨을 하는 글을 쓰는 건 두고두고 부끄러워 해야할 일이오."


결국 그 자신도 병마로 고생하다가 1942년 5월 25일 한창 나이인 35살에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시신은 그의 부친 이시후에 의해 강원도 진부면 하진부리 곧은골에 매장되었고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1998년 9월에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되었다.

1982년 10월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작가의 대표작품

그의 저작 활동은 100편에 가까운 단편에 집중되어 있으나,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에 발표한 시를 비롯하여 장편소설, 수필, 평론, 희곡 · 시나리오, 번역 등 다방면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단편집 기준으로 그의 대표작을 추리면, <노령근해(露領近海)>[5], <해바라기>[6], <이효석단편집>[7] 등이 있다.

장편으로는 『화분(花粉)』(1939년 작), 『벽공무한(碧空無限)』(1941년 작)[8]이 있으며 이 중 『화분』은 1972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하였다.

110편이 넘는 수필을 발표하여 당대에는 수필가로서도 명망이 높았으며 중 · 고교 교과서에 실린 바 있는 「낙엽을 태우면서」가 대표작이다.

1달에 7~8편의 영화를 감상한 영화광이라 전하며, 직접 희곡과 시나리오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김유영(金幽影), 서광제(徐光齊), 안석영(安夕影) 등과 함께 ‘조선씨나리오·라이터협회’를 결성하고 연작 시나리오 「화륜(火輪)」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침체의 늪에 빠진 당시 조선 영화계에 활력을 주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창작한 희곡 · 시나리오 7편 중 생전에 영화화한 작품은 <화륜>(1931년 개봉, 김유영 감독), <애련송(愛戀頌)>(1939년 개봉, 김유영 감독)[9]이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