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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자용 꿀텐츠/한국을 빛낸 작가들

한국을 빛낸 시인들 6번째 - 시인 서정주

by 꿀댈 2021.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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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

우리나라의유명 시인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을 빛낸 시인들 6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백석''정지용' '김수영','박목월''박두진'시인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https://gguldaeri.tistory.com/3

https://gguldaeri.tistory.com/4

https://gguldaeri.tistory.com/5

https://gguldaeri.tistory.com/6

https://gguldaeri.tistory.com/7

 

이번에는 서정주시인에 대해 소개해볼까 합니다.

 

서정주시인은 정말 유명한 시인이죠 !

다만 친일 및 반인륜적 행적과 신 군부치하에서의

처신등으로 역사적 평가에 있어 논란이 대상이 되긴 한다고 합니다.

 

그럼 소개시작할게요.

 

1. 시인소개

시인 소개는 위키백과의 내용을 가지고 왔습니다. !

서정주(徐廷柱,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는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시인이며 교육자이다.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쓴 한국의 이른바 생명파 시인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이며, 본관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 궁발(窮髮), 뚝술이다. 탁월한 시적 자질과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해방 전후에 걸쳐 한국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및 반인륜 행적과 신군부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역사적 평가에 있어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출생하였고 전라북도 부안에서 성장하였다. 서정주의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 이를 두고 서정주 본인은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고백했다. 노비의 자식으로 서럽기만 했다던 서정주는 대를 이어온 노비의 신분을 벗어던짐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고 노비의 설움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자 그리고 내면에서 솟아나는 문학적 욕구를 펴고자 했다고 서정주는 주장한다.[1] 그러나 마름이라는 당시 사회적 지위상 진짜 서정주가 고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는지는 의문이고, 정황상으로도 당시 서정주는 14세에 서울로 상경해 중앙보통학교에 다녔던 정도로 어느정도 사는 집안으로 추측이 가능하며 적어도 서정주의 과장처럼 노비자식같은 대우는 확실히 아니었다.

1933년 겨울, 개운사 대원암에서 영호당 박한영 스님 밑에서 수학했다. 1936년 경성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36년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잡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 때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과 카미카제 같은 전쟁범죄들을 찬양하며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통해 친일 행위를 하였다. 훗날 이 전범 행위가 불거지자 서정주는 이때 전범행위를 종천순일파라고 자칭하며 일본에게 친일행위는 했으나 받은 대가가 없다는 식으로 변명하다가[2],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하여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라는 식으로 변명한다.[3]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1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해방 후에는 당시 문학계를 풍미하던 좌익 계열의 문학적 흐름에 반대하여, 이른바 순수 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결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다수의 문학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줄곧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 강점기뿐만 아니라, 군부 독재와 유신독재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문학적 명성과는 별도로 그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그의 고택이 2000년대 후반 정부에 의해 복원 전 잠시 폐가로 버려져 있었다.

2000년 12월 24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현재 그의 고향 고창군에 미당문학관과 그가 살았던 서울 관악구에 미당이 살았던 집이 있다. 실제로 관악구와 고창군은 미당의 인연을 계기로 자매결연도시로 있다.[5][6]

 

2. 서정주의 대표작품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1]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2]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3]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4]
갑오년[5]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6]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7]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8]에는
몇 방울의 피[9]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10]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화사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나,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기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견우의 노래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추천사
- 춘향의 말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베갯모에 뇌이듯 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이번에는 미당 서정주 시인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역사의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어서 논란이 있지만.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대단하셨던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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